본문 바로가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야기

정치신뢰 깨고 사회 분열…화약고 된 “백년대계”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2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며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수정안에는 원안은 다 빠지고 플러스 알파 밖에 없다”며 “결과적으로 국민한테 한 약속을 어기고 신뢰를 잃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뉴시스


“모든 국가적 사안에 대해 작은 이익을 앞세우는 소아적 사고와 지역분할의 정치논리에서 벗어나 국가 백년대계와 나라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성숙한 국민의식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12일 충북 단양군 구인사에서 열린 상월원각 대조사 탄신 98돌 법요식에서 신재민 문화부 차관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전날 공개된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시민들은 작은 이익과 지역분할을 부추기는 소아병자로 규정한 셈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자신만이 옳다는 주관적 상황 인식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많다. “행정부처 분할에 따른 비효율성 해소”를 명분 삼아 일방통행식 속도전으로 추진된 세종시 수정 작업이 초래한 수많은 문제점엔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 정치적 신뢰 실종 이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 드라이브는 우리 사회의 주요 자산인 신뢰와 안정성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우선, 이 대통령은 스스로 선거를 통해 정당성과 안정성을 확보한 정책을 폐기했다. 이는 정책적 어젠다를 내걸고 정권을 위임받는 선거의 기본 원리를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세종시 원안은 노무현 정부가 지역 균형발전 공약에 따라 추진하고, 수도분할 논란으로 헌법재판소의 위헌 논란까지 겪으며 2005년 3월2일 국회를 통과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물론 야당인 한나라당까지 지혜를 모아 절충한 정치적 합의였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7년 대선 과정과 2008년 취임 이후 “정부 마음대로 취소하고 변경할 수 없다”며 원안 시행을 20여 차례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정운찬 총리를 지명하고 “행정 비효율”을 명분으로 일방주의적 속도전을 감행하며 이를 한순간에 뒤흔들었다.

이 대통령은 또 세종시 수정 문제를 끊임없이 정치가 아닌 정책으로 분리해, ‘정치는 나쁘고 정책은 좋다’는 선악의 이분법을 부추기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이 발표된 11일에도 “세종시는 순수 정책 사안으로 정치 현안과 구분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컨설팅사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대선 공약이나 국가의 주요 정책이 고정불변은 아니지만, 그것을 고치는 방식은 정치적 신뢰와 안정성을 최대한 유지해야 한다”며 “이는 대통령 개인이 아닌 정치 전반의 신뢰가 달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전임 정권과 과거 한나라당이 합의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약속한 세종시는 본질적으로 정책 이슈가 아닌 정치 이슈”라며 “대통령의 정치와 정책 분리 방식은 정치적 신뢰만 약화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


» 이 대통령의 세종시 발언
■ 민주적 절차 무시 세종시 수정 추진의 방식과 절차에서 민주주의가 실종돼 심각한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의 일방주의적 속도전은 결과적으로 여당은 거수기로, 국회는 통법부로 만들어 권위주의에 저항하며 축적해온 정당 민주화와 국회의 독립성을 훼손했다. 수정안은 수정 방침에 찬성하는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안상수 원내대표와 청와대·총리실의 핵심 인사들이 참여한 ‘8인 수뇌회동’에서 조율했을 뿐, 여당 의원들에게는 정보가 공유되지 않았다. 친이 직계 고위당직자들조차 “수정안이 나와 봐야 뭘 할 것 아니냐. 결국 수정안을 정하면 따라오라는 얘기”라고 볼멘소리를 할 만큼 소외감이 심했다.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에 입주기업과 이들에 제공할 각종 특혜를 확정한 뒤 국회에 관련법 개정을 주문하고 나서 사실상 국회의 위상을 통법부로 격하시킨 것도 심각한 민주주의 퇴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영태 교수(인하대)는 “국론이 극심하게 엇갈리는 이런 중대한 문제는 공청회 등을 통해 국민 의사를 충분히 모으고 야당을 설득하고, 반대자가 소수가 될 때 대통령이 결단하는 게 정상적인 절차”라며 “세종시 수정 절차는 본말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말했다.

■ 심각한 갈등 비용 정치적 신뢰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추진된 수정 드라이브는 결국 우리 사회에 심각한 갈등과 부담을 떠안길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민주당·자유선진당 등 야당이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현역 의원이 삭발 단식을 시작해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등이 ‘원안’을 고수하고, 여당 지도부도 세종시 수정안의 국회 처리 시점을 확정하지 못해 수정 논란이 장기 표류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자칫, 정치적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안개정국이 이어질 수도 있다.

더욱이 세종시에 대한 과도한 특혜로 지역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점은 심각하다. 정치권의 대응 여하에 따라 그동안 완화되는 듯했던 지역주의가 다시 격화되고, 고착화할 위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