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슴이 뜨꺼워지는 이야기

기름보일러보다 볏짚…‘없는 사람’ 보듬는 ‘적정 기술’

[한겨레] 우리 이웃들에게 꼭 필요한데도


상업성 이유로 사라지는 기술 많아


볏짚·왕겨 등 이용한 ‘생태 단열’


돈 많이 안들고 친환경·반영구적


충남 노인 가구 12곳 ‘따뜻한 선물’







지난 2일 충남 논산시 채운면에서 충남적정기술협동조합연합회 회원들이 볏짚을 압축한 단열재와 황토를 이용해 홀몸노인의 방을 고쳐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 ‘따뜻한 기술’

“사는 게 지옥이여….” 지난 2일 충남 논산시 채운면 야화리. 12월로 접어들자 기다렸다는 듯 폭설이 쏟아지고 기온이 곤두박질했다. 정신애(78) 할머니는 6.6㎡(2평)도 채 안 되는 방에서 혼자 지낸다. 남편은 세상을 뜬 지 오래다. 지은 지 수십년 된 집은 곳곳에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잤어.” 단열이 제대로 안 된 벽과 창에서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니 겨우내 정 할머니는 감기약을 한번도 끊어본 적이 없다.

화산리에 사는 임복례(84) 할머니 또한 홀몸노인이다. 지은 지 30년을 훌쩍 넘긴 집은 낡을 대로 낡아서 2층은 아예 쓰지도 못한다. 임 할머니는 무릎 연골이 다 닳아서 정강이까지 물이 찼지만 수술도 못하고 있다. 뻔한 살림에 돈이 귀신보다 무서우니 기름보일러 스위치에 좀처럼 손을 못 댄다. 전기장판에다 두꺼운 이불이 전부지만 냉기는 야속하게도 아픈 무릎을 송곳처럼 찌른다.

그런 할머니들에게 이달 들어 따뜻한 선물이 전해졌다. 환경부 공모(기후변화 안심마을)에 선정된 충남도·논산시에서 푸른충남21실천협의회와 함께 정 할머니를 비롯한 채운면 노인 취약계층 12가구마다 방 하나씩 생태단열 작업을 해준 것이다. 12가구 가운데 9가구가 노인 혼자 지내며, 작업이 진행되는 화산리·야화리에는 주민 882명 가운데 65살 이상 노인 315명을 비롯해 절반이 취약계층이다. 가구당 300만원을 들여 스티로폼 대신 볏짚을 압축한 단열재를 외벽에 붙이고 황토로 말끔하게 마감하니 어엿한 찜질방이 따로 없다. 두께 5㎝짜리 볏짚보드는 냉기를 차단하는 단열 기능이 스티로폼에 견줘 손색이 없는데다 친환경적이다. 여기에 1㎝ 두께로 황토칠을 하고 나면 반영구적으로 단열 효과를 낸다.

가난해서 쓸쓸한 정 할머니는 요즘 화사한 외출복을 입고 텔레비전 연속극을 재미나게 본다. “이번에 방을 고쳐줬으니께 고장 날 때까지 살아야지, 아까우니까.” 좀처럼 집 밖으로 거동을 못하는 임 할머니도 “없는 사람 사정을 어떻게 알고 해주네”라며 고마워했다. 현장 작업을 총괄하는 김석균 ‘흙건축연구소 살림’ 대표는 “농촌 어르신들에게 특히 한겨울은 사는 게 아니라 차라리 견디는 것이다. 우리 이웃들에게 꼭 필요하지만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라지는 기술이 많은데, 볏짚·왕겨를 이용한 생태단열과 같은 적정기술은 그야말로 한겨울에 따뜻한 기술이다”라고 말했다.

■ 지속가능한 열쇠

적정기술은 기술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고 소규모와 단순성,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철학이자 사회개혁 운동이다. 1965년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가 창안한 중간기술 개념이 적정기술의 시초다. ‘적정기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슈마허는 선진국의 거대·고도 기술을 개발도상국에 그대로 주입하는 기술 원조를 비판하고, 선진국과 저개발국 사이의 중간기술을 주장했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적정기술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였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패럴론연구소(1969)를 시작으로 70년대 들어 영국 대안기술센터(1973), 미국 국립적정기술센터(1976)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국내에는 2000년대 후반에 적정기술이 도입돼 생태공동체, 귀농·귀촌자, 에너지 자립마을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2006년 경남 산청에 대안기술센터(이동근 소장)가 설립됐고 2009년 한밭대에 적정기술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지난해에는 전북 완주에 ‘전환기술 사회적 협동조합’이 결성됐다. 안병일 전환기술 사회적 협동조합 상임이사(작은손적정기술협동조합 이사장)는 “적정기술은 기술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첨단기술과 달리 전통지식을 활용하거나 약간의 기술 전수만 받으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선 2000년대 후반에야 등장
지자체선 충남이 가장 적극 나서
성공하려면 지역주민 협력 필수


국내에서 활용되는 적정기술은 냉방보다는 난방에 집중돼 있다. 기존 주택보다 단열 기능을 높여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에너지 자립형 주택이 대표적이다. 경남 산청 민들레공동체의 대안기술센터는 동·서·북쪽 벽을 왕겨로 단열하고 남쪽은 축열벽과 온실로 구성돼 있다. 한겨울 바깥 기온이 밤새 영하로 낮아도 실내온도는 난방 없이 섭씨 9~12도를 유지한다. 이밖에 화목 난로·보일러, 태양열 온풍기·온수기, 생태단열 등이 현장에서 많이 보급되고 있다. 홍성욱 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화학생명공학과 교수)은 “일본의 경우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때 대규모 정전·단수를 겪은 뒤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적정기술은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모두의 문제이자 관심사이며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 삶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2일 논산시 채운면 화산리에 사는 신명순(82) 할머니가 볏짚을 압축한 단열재와 황토로 고쳐진 방을 살펴보고 있다.
■ 적정기술 선두 충남

충남도는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지난 4월 ‘적정기술 확산 기본계획’을 만들고 에너지 저소비, 친환경,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 마련에 들어갔다. 4개 분야 10개 과제를 선정해 국비를 신청하고 충남발전연구원, 도내 협동조합들과도 협업을 추진하고 있다. 안희정 지사는 지난 9월 홍성욱 교수와 이동근 대안기술센터 소장을 집무실로 초청해 ‘나눔을 위한 적정기술’을 주제로 학습토론회를 열었다.

충남도는 농촌 지역의 월 소득 100만원 미만 가구의 경우 난방비에만 3분의 1 넘게 지출해야 하는 현실을 고려해 취약·빈곤 계층을 우선 배려한다는 계획이다. 또 도의 핵심 정책인 3농(농어업·농어촌·농어민)혁신과 연계해 농촌마을의 환경·일자리·복지를 아우른 대안모델을 만들고, 적정기술에 관심 있는 도민들을 위한 교재 개발·보급에도 나서기로 했다.

민간 차원에서도 충남은 적정기술 분야에서 가장 활발한 곳이다. 지난 7월 충남에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적정기술협동조합연합회가 꾸려져 최근 기획재정부에 인가 신청서를 냈다. 공주 두레적정기술협동조합, 홍성 얼렁뚝딱집짓기노동자협동조합과 아하생활기술협동조합, 아산 작은손적정기술협동조합과 송악에너지공방협동조합 등 5곳이 뭉쳤다.

박승옥 충남적정기술협동조합연합회 회장은 “적정기술의 핵심은 탈석유 적정 농업기술이다. 그러나 일회성 전시용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공동체 복원 활동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합회는 조만간 안희정 지사를 만나 충남형 에너지-농업 적정기술 협치사업을 제안하기로 했다.

아직 초기 단계인 적정기술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 위해서는 중앙·지방정부의 정책 지원뿐 아니라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의 협업이 필수다. 홍성욱 교수는 “대기업 중심에서 지역 중소기업 중심, 마을 단위 지역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시설 마련, 주택 단열과 재생에너지 설비 지원 등 정부의 정책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논산/글·사진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적정기술

적정기술은 중간기술,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따뜻한 기술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일컬어진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독일 태생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1911~1977)가 1965년 유네스코 회의에서 처음 제안해 내년에 50돌을 맞는다. 소외계층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효과적인 기술인 동시에 에너지 사용량이 적고 친환경적이어서 지속가능한 기술로 꼽힌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스탠퍼드대 등에서는 학생들에게 정규 교과목으로 적정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적정기술미래포럼(approtech.or.kr),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kcot.kr)에서 자세한 정보를 볼 수 있다.